[스타 인터뷰] 오랜 공백 딛고 그린 평정 나선 ‘핫식스’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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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찬 신예 이정은이 올해 KLPGA MVP포인트 선두를 달리고 있다. 월간중앙과의 인터뷰 후 손가락으로 ‘6’을 표시하고 있는 이정은.
“안녕하세요, 이정은 식스(6) 프로입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이정은(21·토니모리).
그는 KLPGA 투어에 ‘이정은6’로 등록돼 있다. 같은 이름의 선수가 여럿이라 입회 순서대로 이름 뒤에 숫자를 써 구분한 것이다.
현역으로 뛰는 이정은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를 병행하는 이정은5와 KLPGA 투어 2년차 이정은6, 이렇게 두 명이다.
더위가 한풀 꺾인 8월 10일 오후, 제주의 한 대회장에서 만난 이정은은 반듯한 인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굳이 이름 뒤에 ‘식스’를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이정은은 자기소개부터 철저했다.
다른 선수들 얘기가 나올 때도 “OOO 프로님은 이런 이유에서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실력부터 언행까지 ‘프로페셔널’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이정은은 요즘 국내 여자골프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다.
벌써 시즌 2승을 거둬 대상(MVP)포인트 1위(345점), 평균타수 1위(69.71타), 상금랭킹 2위(5억 6900만원)를 달린다.
톱10 진입률도 75%로 1위. 이정은은 이 정도 성적표면 앞으로 ‘핫식스’로 불러야 할 것 같다는 칭찬을 듣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 그 별명 마음에 들어요. 핫식스? 저 그걸로 할래요.”
“휠체어 탄 아버지 생각하면 멈출 수 없어요
이정은이 7월 23일 경기도 파주 서원밸리CC에서 열린 한국여자 프로골프(KLPGA) 투어 MY 문영 퀸즈파크 챔피언십에서
KLPGA 투어 대회장에는 지난해 휠체어를 탄 한 남성이 자주 보였다. 이정은의 아버지 이정호(53) 씨다.
덤프트럭 기사로 일하던 이씨는 이정은이 네 살 때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량이 30m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고 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를 갖게 됐다.
이정은은 “골프가 잘 안 될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기도 했는데 휠체어에 탄 아버지 생각만 하면 정신이 든다.
골프에 집중하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버지 이씨는 장애인용 승합차를 직접 운전하면서 전담 기사로 외동딸을 뒷바라지했다.
골프를 시키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고향인 전남 순천에는 부녀를 끔찍이 아끼는 고마운 이웃이 꽤 많다고 한다.
이들은 십시일반으로 이정은의 선수생활을 도왔고, 이정은은 2015년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2관왕에 오르면서 골프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해는 7차례 톱10에 진입, 상금랭킹 24위(2억5765만원)와 평균타수 13위(71.68타)의 기록으로 KLPGA 투어 신인왕에 올랐다.
받은 상금은 순천에 살던 부모님이 전셋집을 경기도 용인으로 옮기는 데 보탰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새로운 전동 휠체어도 선물했다. 아버지 이씨는 딸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대회장을 찾기보다 장애인 탁구에 전념하고 있다.
대신 대회장 밖에서는 순천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골프를 시작한 이정은은 한때 골프채를 놓았다.
“운동 자체가 싫었던 때였어요. 초등학교 5학년 말에 그만두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니 진로가 고민되더라고요. 뭘 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그래도 예전에 했던 게 골프니까 ‘나중에 레슨프로가 돼 돈을 벌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다시 시작했어요.
그렇게 골프를 다시 시작하니까 전에 없던 절실함이 생기더라고요. 그 절실함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이정은이 3년 동안 골프를 떠났던 것은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적지 않은 돈을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데 쓰는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단다.
어렵게 다시 잡은 골프채로 이정은은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퍼트 연습에만 하루에 12시간씩 매달릴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에 이정은은 실력이 일취월장해 고교 시절 대표 팀에 선발됐고, 목표도 투어프로로 바꿨다.
올해 받은 상금으로 부모가 아닌 본인을 위해 쓰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이정은은 “그냥 쇼핑을 조금 하고 싶다”며 수줍게 웃었다.
“옷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솔직히 어렸을 때는 입고 싶은 옷을 사 입지 못한 게 아쉬웠거든요.
작년에는 집을 구하는 데 돈을 쓰느라 여유가 없었는데 올해는 시즌 끝나면 갖고 싶던 옷을 조금 사보려고 해요.”
이정은이 지난해 신인왕에 오르기는 했지만 ‘우승 없는 신인왕’이란 수식이 뒤따랐다.
신인으로 나무랄 데 없이 성적을 꾸준히 올렸지만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10월 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에서 기록한 3위가 그의 최고 성적이었다.
올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이정은은 보란 듯이 그의 진가를 드러냈다.
지난 4월 2017시즌 국내 개막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마지막 날 경기에서 선두로 나선 적은 처음이었지만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2위와의 스코어를 4타 차로 벌리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전 라운드에 걸쳐 선두 자리를 고수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
이정은은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겠다”고 소감을 밝히면서 눈물을 보였다.
그는 여세를 몰아 7월 전반기 마지막 대회마저 제패하며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올 시즌 다관왕도 노릴 법하지만 정작 그는 “특별히 갖고 싶은 타이틀은 없다.
어떤 것이든 하나만 따내도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신인왕을 너무 의식하다 보니 힘든 시즌을 보냈거든요. 올해는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에스컬레이터처럼 ‘차근차근’ 올라갈래요!
지난해 7월 2일 중국 웨이하이시 웨이하이포인트 호텔&골프리조트에서 열린 금호타이어 여자오픈 2라운드에서 1번 홀 그린을 살펴보고 있는 이정은.
그는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지난해 우승 못한 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고 했다.
“충분히 훌륭한 데뷔 시즌을 보냈고, 우승은 2년차부터 해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승 없는 신인왕이라는 말이 저한테는 부담스럽지도 않았어요.”
이정은은 갖고 싶은 타이틀은 따로 없지만 그 대신에 “메이저대회 우승은 꼭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6월에 열린 메이저대회 한국여자오픈에서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다가 마지막 날 76타를 쳐 6위로 밀려난 것이
그에게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준비를 많이 했던 대회였는데 그만큼 더 아쉬웠다”며
“메이저대회 일정에 맞춰 체력과 집중력을 안배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신인왕이라는 첫 번째 계단에 올라선 이정은은 메이저대회 우승을 두 번째 계단으로 삼으려 한다.
조급해하지 않고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어릴 때 꿈꿔왔던 모습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정은은 KLPGA 투어 간판선수로서의 사명감도 남달라 보인다.
‘수퍼 아마추어’로 이름을 날린 여고생 최혜진의 프로 데뷔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커졌다.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지난해 국내 무대에서 맹활약한 박성현 프로님이 미국 무대에 진출하면서
국내 투어 인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최)혜진이가 들어오면 투어 흥행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누가 이기고 지고를 떠나 제가 속해서 뛰고 있는 투어도 생각해야죠.”
최혜진과는 특히 대표팀 생활을 같이해 가까운 사이란다. 이정은은 “훌륭한 후배가 나온다는 건 경쟁을 떠나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 골프무대에 좋은 선수들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요새 골프를 하는 주니어 학생들의 수가 많이 줄어드는 추세라는 말도 들었어요.
저도 초등학교 5학년인 친척 여동생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 친구들이
지금의 저처럼 좋은 환경에서 골프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큽니다.”
어린 시절 이정은은 골프계 선배인 신지애 선수를 보면서 프로골퍼의 꿈을 키워왔다.
최근에는 ‘골프여제’ 박인비를 만나 큰 영향을 받은 듯하다.
박인비가 후원사 주최 대회라 출전한 KLPGA 투어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
이정은은 박인비와 같은 조로 편성돼 이틀간 함께 코스를 돌 기회를 얻었다.
박인비는 대회 전 기자회견 자리에서 LPGA 투어를 염두에 두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박인비의 충고를 들었던 이정은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고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말씀을 어찌나 조리 있게 잘하시는지 놀랐어요. 그리고 미국 무대가 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설명할 때 또 한 번 놀랐고요.
LPGA 투어 대회를 초청선수 등의 방식으로 한두 번만 경험해본 선수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 시즌을 뛰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진정한 골프가 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셨는데 뭔가 마음에 확 와 닿는 게 있었다.”
이정은에게 미국 무대 진출이나 LPGA 명예의전당 입회 등의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레슨프로로 일하며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보탬이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던 이정은이다.
그런 이정은이 달라진 듯하다. “미국 진출에 대한 마음이 그전까지 0%였다면 박인비 프로님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20% 정도로 올라갔다.
정말 뭔가 특별한 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마침 이정은은 지난 7월에 LPGA 투어 대회를 처음 경험했다.
그가 5월 16일자 세계랭킹에서 50위 안(41위)에 오르고 나서 LPGA 최고 메이저인 US 여자오픈에 초대받은 것이다.
당초 준비를 하면서 성적을 떠나 경험만으로도 만족하려던 대회였다.
모든 게 낯설었지만 이정은은 이 대회에서 공동 5위에 오르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2라운드에서는 선두에 2타 뒤진 공동 2위에 이름을 올려 국내외 언론의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KLPGA 투어의 경쟁력을 묻는 질문에 대해 이정은은
“한 대회에서 우승해도 그 다음주에 컷 탈락할 수 있는 투어다.
반대로 컷 탈락한 선수도 언제든 우승할 수 있는 레벨을 갖고 있다”고 통역을 통해 대답했다.
‘골프여제’ 박인비가 제시한 새로운 꿈
이정은이 6월 18일 인천 베어즈베스트 청라CC에서 열린 ‘기아자동차 제31회 한국여자오픈 골프선수권대회’ 7번 홀에서 칩샷을 하고 있다. / 사진·KLPGA
LPGA 투어에서 ‘싸움닭’으로 통하는 크리스티 커(미국)와 같은 조에서 라운드한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커는 플레이 도중 큰소리로 화를 내는 등 감정 표현에 절제가 없는 선수로도 유명하다.
질질 끄는 슬로 플레이도 동반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으로 지적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해설자로 대회장을 찾은 명예의전당 회원 줄리 잉크스터(미국)가 경기 전에 이정은에게
“커는 지저분한 플레이로 악명 높으니 특별히 조심해라”고 귀띔해줬다는 것.
이정은은 “잉크스터도 미국 선수 아닌가. 커는 다른 나라 선수뿐 아니라 자국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통한다는 게 신기했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이정은은 “처음부터 걱정을 많이 해서 그런지 커와의 플레이는 생각보다 무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배울 점이 많았다. 노장에 속하는 선수라 저보다 20야드는 드라이브 샷 거리가 짧을 줄 알았는데 거의 똑같이 나가더라”며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정은은 이 대회에서 단번에 2억원에 가까운 엄청난 상금을 획득하기도 했다.
국내 투어 2년째인 올 시즌을 마치고 나면 이정은에게도 더 큰 꿈을 향한 구체적인 밑그림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승승장구하는 이정은 골프의 경쟁력이 그의 단단한 하체에서 나온다고들 분석한다.
이정은도 일정 부분 이를 인정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는데
운동을 하면 하체 근육이 남들보다 잘 붙는 편이다.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 맞는 바지를 찾기 힘들 정도다.
허리 사이즈에 따라 바지를 골라봤자 다리가 들어가지 않아 먼저 허벅지에 맞는 바지를 고른 뒤 허리 부분을 줄여서 입는 식이다.
프로 데뷔 후에는 체력 훈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상체 운동에 할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정은은 “어릴 때 스윙을 워낙 잘못 배워서 그런지 상체가 틀어져 있다.
상체가 하체의 힘을 따라가지 못해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인데 그런 부분을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최근에야 다른 선수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온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정은은 평소 훈련만큼이나 책도 가까이한다. 대회가 없는 날은 물론이고 대회 기간에도 숙소로 돌아가면 꼭 책을 펼친다.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문구는 따로 기억해놓았다가 그다음 날 경기 내내 되뇐다.
“골프는 몸보다 정신적으로 힘들 수 있는 스포츠잖아요. 흔들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려고, 또 강해지려고 책을 봅니다.”
요즘에는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라는 책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훗날 어떤 골프선수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이정은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신 “‘노력파’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항상 노력하고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지금의 스타일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저의 지금 모습을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결같은 선수로 남고 싶습니다.”
- 글·사진 양준호 서울경제 골프전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