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신인왕에 이어 올해 상반기에만 2승을 거둔 이정은6. 생애 첫 출전이었던 LPGA 투어 US여자오픈에선 공동 5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KLPGA 상반기를 마치고 2주간의 휴식기 동안 김지현에 이어 '대세녀'로 떠오른 이정은6를 만났다.(사진=이영미)>
KLPGA 상반기 키워드는 ‘지현 천하’와 ‘대세 이정은’이었다.
김지현과 김지현2, 이지현2와 오지현이 최근 5주 연속 우승을 이어가는 동안 이정은6가 홀로 ‘지현 천하’에 맞서며 2승을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이정은6는 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서 공동 5위에 오른 바 있다.
지난해 신인왕에 이어 올해 우승으로 임팩트 있는 시즌을 소화하고 있는 이정은6는 김지현(약 6억 7800만 원)에 이어 상금 랭킹 2위(5억 3000만 원),
대상 포인트는 316점으로 1위에 올랐다.
평균타수는 1위(69.82)이고 올 시즌 출전한 15개 대회서 11번이나 톱10 안에 들며 톱텐 피니시율(73.33%)도 선두를 차지했다.
한국 나이로 22세에 불과한 이정은의 가장 큰 강점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강철 멘털로 극복해내고 우승의 발판을 만들어낸다.
지난해 신인왕에 이어 올해 2승을 거두며 ‘대세녀’로 자리잡은 이정은6를 만났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골프를 해온 터라 이정은6의 골프 스토리에는 감동이 흘러 넘쳤다. 그의 얘기를 들어본다.
미국도 처음, LPGA도 처음, 그런데 공동5위!
지난 17일 막을 내린 US여자오픈 출전이 처음 경험하는 LPGA 대회라고 들었다. 미국도 처음 방문한 것이라고 하던데 미국 여정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모든 게 처음이라 미국 가기 전에는 부담과 두려움이 있었다. 적응을 하기 위해 대회 일주일 전에 미리 가서 현지 훈련을 이어갔는데 날씨의 변화가 심했다.
잔디도 KLPGA 투어랑은 차이가 있었다. 러프가 길고 페어웨이는 좁은 상태였다.
작은 실수에도 공이 러프에 빠지거나 보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많은 얘기를 듣고 가서 그런지 크게 놀랍진 않았다.”
대회 시작 전까지 몇 차례 라운딩을 해본 건가.
“세 번 했었다. 한 번은 18홀을 돌았고, 두 번은 9홀씩 쳤다.”
LPGA 분위기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나이 많은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LPGA는 결혼 후 아이가 있어도, 40세가 넘어서도 투어 생활을 하는 선수들이 많더라.
한국은 서른 살 넘으면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편인데 미국의 골프 문화는 우리하고는 차이가 있었다.
US여자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서 만난 선수가 크리스티 커였다. 마흔 살의 나이에도 카리스마를 잃지 않고 자신의 골프를 이어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더라.
크리스티 커를 보면서 ‘나도 저 나이까지 골프를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선 생애 첫 출전이었던 US여자오픈이 내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많은 나이에도 투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으니까.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비즈니스석을 이용했다.
내가 열심히 골프를 한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크리스티 커가 감정 기복이 심한 선수라고 알려졌는데 마지막 라운드에서 만났을 때 살짝 긴장되진 않았나.
“일단 영어가 안돼서 그가 뭐라고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웃음).
크리스티 커랑 한 조란 사실을 알고 주위에 조언을 구했더니 신경쓰지 말고 플레이에만 집중하라고 하더라.
크리스티 커가 날 처음 보고 기선 제압을 하려 했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았다.”
이정은은 원래 US여자오픈대회 출전 자격이 없었다. KLPGA 투어 선수는 지난해 상금 랭킹 5위 안에 들어야 출전이 가능했지만 이정은의 순위는 24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올시즌 첫 승을 거두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세계 랭킹을 40위까지 끌어올렸고, 50위 이내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출전 티켓을 확보한 것이다.
그는 이 대회를 앞두고 예선 통과를 목표로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 1,2라운드 성적이 아주 좋았다.
3라운드에선 컨디션 난조로 주춤하다가 4라운드에서 컨디션을 회복하며 공동 5위로 대회를 마쳤다.
시차 적응에 애를 먹고 뭉친 근육이 풀리지 않으면서 스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지만 이정은은 첫 LPGA 대회에서 나름 흡족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고채로 시작했던 골프. 어린 나이의 이정은이 할 수 있었던 건 골프를 잘 치는 일 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고채로 시작한 골프, 오기로 견뎌낸 시간들
평소 ‘멘탈 갑’이란 얘길 많이 듣는다.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는 비결이 뭔가.
“어렸을 때 골프를 시작하면서 여유있는 환경에서 운동한 게 아니라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면 정신이 번쩍 드는 편이다.
덕분에 버티면서 이겨내고 살아가는 게 몸에 배었다. 그런 모습들이 정신적으로 강해 보이게 하는 것 같다.”
골프는 기본적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스포츠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골프를 하다 보면 매번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텐데 어떻게 그 환경들을 이겨낼 수 있었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아시는 티칭 프로님의 도움을 받으며 골프를 시작했다. 골프채 살 돈이 없어 중고를 구입해서 썼는데 대회 나갔다가 놀림을 받은 적도 있었다.
큰 상처가 됐다. 그걸 그대로 되갚아 주고 싶었지만 난 힘이 없었다. 무조건 골프로 복수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 대회에서 오기로 골프를 쳤던 것 같다.
복수심이 내가 처한 어려운 환경들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었다. 지난해 신인왕에 오르기 전까지 정말 힘들게 생활했다.
신인왕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걸 갖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기도 했다.
무승으로 신인왕을 차지했기 때문에 올해 꼭 우승을 경험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2승을 거둔 것이다.
만약 우승이 없었더라면 우승을 좇느라 마음이 바쁘고 정신없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우승 덕분에 골프가 아주 매력있는 스포츠란 생각이 든다.”
이정은은 이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처음 만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이 그렁거렸을 정도로 이정은이 말하는 지난 일들의 아픔은, 인내는, 그리고 경험들은 깊고 또 진했다.
덕분에 골프에 더 매달렸고, 골프를 통해 성공하고 싶은 간절함이 커졌지만 성장기에 그가 느꼈을 인간적인 갈등이 기자한테도 전해지는 듯 해 절로 이정은의 손을 잡게 됐다.
그냥 힘내자는 의미였다.
신인왕 수상 이후 골프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나.
“이전에는 내 골프에만 집중했다. 골프장의 환경이 어떠한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무조건 티박스와 페어웨이, 홀컵 등만 쳐다봤다. 그래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인왕 이후에는 골프장의 나무와 산, 코스를 보는 여유가 생겼다. 그 점이 가장 큰 차이가 될 것이다.”
<골프 선수로 성공할 생각보다 티칭 프로로 돈을 벌고 싶었다는 이정은6. 물론 처음 골프를 시작할 때의 생각이다.>
처음엔 티칭 프로를 꿈꿨다!
티칭 프로를 하려고 골프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가.
“위에서 언급한 티칭 프로님이 아빠의 후배이셨다. 그 분 밑에서 골프를 배우며 티칭 프로를 하면 돈을 벌 수 있겠다 싶더라.
무엇보다 골프 투어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레슨 프로로 돈을 벌자는 게 목표였다.
순천에는 여자 프로가 없어 내가 레슨 프로가 되면 인기를 얻을 거라는 티칭 프로님의 조언도 한몫했다.
고2 때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상비군에 뽑혔다. 국가대표 출신들이 모두 출전한 대회에서 그들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상비군에 이어 국가대표팀 선수로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골프에서 성적을 내기 시작하자 티칭 프로의 꿈을 접게 됐다. 골프 선수로 성공하고 싶었고, 인정받기를 원했다.
지난 시즌 프로로 전향하면서 신인왕에 오르는 등 대회 상금을 모으다 보니 경제적인 부담도 덜었다.
가장 감사했던 건 스폰서인 토니모리와의 계약이었다. 회사 후원을 받다보니 생활면에선 한층 안정됐고, 골프에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내가 인복이 많은 편인 것 같다.”
이정은의 아버지 이정호 씨는 이정은이 4살 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딸을 뒷바라지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성장한 이정은으로선 하루라도 빨리 성공하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집안 형편에 도움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정은은 지난해 28번의 대회에 참가, 모두 2억5761만 원의 상금을 챙겼다. 28번의 대회에서 컷오프 탈락은 단 두 번에 그쳤고 톱10 안에 7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우승은 없었지만 꾸준한 성적을 낸 덕분에 신인왕 타이틀의 주인공이 됐다. 이정은은 지난해 받은 상금과 토니모리와의 계약금을 보태 경기도 용인에 전세 아파트를 마련해 부모님을 모셨다.
그 집으로 이사하는 날, 이정은은 펑펑 울었다고 한다.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싶었던 꿈이 드디어 현실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정은6하면 ‘소녀 가장’, ‘효녀 골퍼’란 인식이 강하다.
“아버지가 사고로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포기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날 뒷바라지 해주셨다.
올시즌에는 아버지가 탁구에 심취하시는 바람에 모든 대회를 찾아오지 않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빠짐없이 대회가 열리는 골프장을 찾아오셨다.
아버지의 불편한 모습을 보고 골프를 했기 때문에 내가 잘해야 아버지가, 우리 가족이 행복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우승을 하고, 방송을 타고, 상금을 챙기면서 조금씩 가정 형편이 나아지는 걸 절감했고, 가족들도 이전보다 나은 환경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게 굉장한 동기부여가 된다.
가끔은 내가 부모님께 의지하고 기대기보단 내가 부모님을 안아줘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안아줄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골프를 더 잘 치고 싶다. 부모님을 오랫동안 안아드릴 수 있게 말이다.”
첫 우승 상금 받으며 든 생각이…
올해 4월 초 국내 개막전인 ‘롯데렌터카 여자오픈’에서 첫 승을 이렀다.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나.
“얼떨떨했다. 지난해에도 성적이 나쁘지 않아 올해 1승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너무 일찍 우승을 맛보았다. 상금을 받는 순간 ‘올 한 해 시합 비용은 벌었구나’ 싶더라.
스폰서인 토니모리에서도 우승하면 보너스를 준다고 해서 기분이 더 좋았다.
상반기 마지막 대회인 my문영 퀸즈파크 챔피언십에서 최종 합계 13언더파 203타로 박소연(25·문영그룹)을 한 타차로 따돌리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는데 그때는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승이 만병통치약인 것 같다. 엄마가 평소에는 ‘잘했다’는 칭찬을 안 하시는 편인데 2승을 거뒀을 때는 전화로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셨다.”
이정은은 지난 겨울 50일 동안 태국에서 전지훈련을 가졌다. 체력 훈련을 기본으로 하면서 100미터 이내 쇼트 아이언 연습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스윙으로 팔과 상하체의 조화가 돋보이는 이정은은 올시즌 퍼트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우승을 향한 레이스에도 가속도가 붙은 케이스이다.
한국 여자 골프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는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선배들의 활약이다. 박세리, 신지애, 박인비 프로님들이 세계랭킹 1위를 차지하며 한국 골프의 위상을 드높였기 때문에 후배들도 자신감을 갖고 도전에 나섰던 것이다.
체격이 훨씬 좋은 외국 선수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해나가는 모습에 용기를 낸 골퍼들이 많을 것이다. 내 롤모델은 신지애 프로님이었다.
내가 막 골프를 시작할 때 엄청난 활약을 펼친 선수라 그 프로님처럼 골프를 잘 치고 싶었다.”
아직은 LPGA 진출 계획 없다!
LPGA 진출 시기에 대해 말들이 많다. 당장 도전하라는 의견도 있고, 좀 더 KLPGA 투어를 경험하라는 얘기도 나온다.
“솔직히 아직은 생각이 없다. 설령 우승으로 풀시드권을 받았다고 해도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선 가고 싶지 않다.
3,4년 더 KLPGA에서 해본 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준비할 계획이다. 분명한 건 지금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정은6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골프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자신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 대가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은인이었다.
“순천에서 사업하시는 송명종 회장님, 팬클럽 회장인 정우태 회장님, 경기도골프협회 김봉주 회장님, 그리고 지산아카데미 이준석 프로님에게 빚을 많이 졌다.
골프하면서 평생 갚아나가야 할 빚이다. 아무 것도 없는 내게, 아무 성적도 내지 못했던 내게 가능성만 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평생 빚 갚는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이분들을 챙기고 싶다.”
KLPGA에 ‘이정은’이란 이름이 여섯 명이나 되는 바람에 ‘이정은’ 대신 ‘이정은6’로 불리는 그. 선수들 사이에선 이름보다 ‘식스’란 별칭이 통용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정은6’란 이름에 애착이 간다고 말한다. 그의 팬클럽 이름도 이름을 따 ‘럭키 식스’이다. 후반기에도 그에게 행운이 계속되길 바란다.
<꽃길만 걷길 바라지만 이정은6라면 고난의 길도 잘 헤쳐나갈 것이다. 그동안의 다양한 경험들이 그의 골프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사진 아래=이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