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골프&스포츠] 그렇게 이정은의 골프는 다시 시작됐다

리스트로 돌아가기

 

 

[골프다이제스트] 아직 소녀 티를 다 벗지 못한 만 스무 살의 프로 골퍼를 만났다.

하지만 외모만 보고 그녀를 판단하면 안 된다.

그 누구보다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감도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내면은 휘저을수록 향기가 확 풍겨나오는 커피를 닮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맑다. 새벽녘 코끝에 밀려오는 바람처럼 싱그럽다.

한낮 커피숍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처럼 따뜻하다.

갑자기 웬 생뚱맞은 소리냐고?

에디터가 가을을 타거나 외로워서 이런 오글거리는 문장을 나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이미지연상 작용의 중간 단계 어디쯤이라고 해두자.
 

에디터는 한 가지 독특한 버릇이 있다.

누군가와 인터뷰를 하고 나면 상대의 이미지를 임의의 한 단어로 만들어놓는다.

혹여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기사를 쓰더라도

그 또는 그녀에게 받은 인상, 당시의 감정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쉽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 단어에서 연상되고 파생되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린다.

그것을 글로 풀어낸 것이 앞서 쭉 나열한 문장이다.

이번에 인터뷰를 한 이정은을 에디터는 ‘커피’라는 단어로 연상할 수 있게 설정해놓았다.
 

그리고 커피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냈다.

이번에는 커피 마시기 좋은 날씨와 분위기를 떠올린 것 같다.

사실 문장에 쓰인 ‘맑다’, ‘싱그럽다’ 그리고 ‘따뜻하다’는 내용은 그녀에게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다.


아버지 그리고 다시 시작한 골프


밝은 표정으로 매니저와 함께 스튜디오로 들어선 이정은은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부모의 행방이 궁금했던 게다.

그들이 길을 잘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에 마중을 나가는 그녀를 함께 뒤따라 나갔다.

혹시나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아버지 이정호 씨가 모는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촬영 때 입을 의상과 골프백을 내리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 이씨는

딸에게 근처 주차장에 있을 거라는 말만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곱게 화장까지 하고 촬영에 임하는 모습을 아버지도 분명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행여 딸이나 촬영 스태프들이 불편해할까 봐 차에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은 듯 보였다.
 

사실 아버지 이 씨는 휠체어 없이는 쉽게 거동할 수 없는 처지다.

덤프트럭 기사였던 그는 딸이 네 살 때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일을 겪었다.

그는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장애인용 자동차를 몰고 딸과 함께 투어 생활을 하고 있다.

“아버지가 직접 운전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어요.

몸이 불편하시다 보니 숙소를 잡는 것도 일입니다.

화장실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고 여러모로 제약이 따르죠.

딸을 위해 그런 번거로움과 불편함도 다 이겨내고 참아내시니까 저도 더 힘을 내야죠.”

이정은의 말이다.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정회원으로 입회한 그녀는

1부투어에서 자신의 첫 시즌을 보내고 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그녀는 아홉 살 때 처음으로 골프 클럽을 잡았다.

당시 아버지 후배 중 한 명이 동네 연습장의 티칭 프로였는데 그녀에게 무료로 레슨을 해줬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배우다가 공부하기 위해 잠깐 골프를 접었다.

하지만 골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시작했다.
 

“사실 골프를 할 수 있는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골프를 계속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게 중학교 3학년 때였으니 또래 친구들보다 많이 늦었죠.

주위에서 도와주신 분들이 없었다면 골프를 계속 하는 게 어려웠을 거예요.”

비록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우월한 체격 조건을 가지고 있던 그녀가

친구들을 따라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3년, 대한골프협회가 주관하는 베어크리크배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 이듬해 국가상비군에 발탁됐다.

아마추어 메이저 대회인 호심배를 2014년부터 2연패 했고

2015년에는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국가대표가 됐다.

같은 해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까지 목에 걸게 된 이정은은

하반기에 아마추어 타이틀을 떼고 프로가 됐다.

 

지난해 KLPGA 점프투어(3부투어)에 출전한 이정은은

자신이 참가한 두 번째 대회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연말에 치러진 KLPGA투어(1부투어) 시드 순위전에서는 30위에 올랐다.

올해 루키로 지금까지 일곱 번 톱10 진입에 성공하는 등

꾸준한 성적으로 상금 랭킹 24위, 신인상 포인트 1위(11월10일 현재)에 올라 있다. 
 

“일단 상금 순위 20위권에 드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예요. 상위권에 있고 싶다는 의미죠.

솔직히 10위권에 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올해는 그 정도만 하더라도 괜찮은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목표는 신인상이에요. 현재 신인상 경쟁이 치열한데 그래야 보시는 분들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모두 국가 대표나 상비군 생활을 함께한 선수들이라 사이좋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름에 얽힌 사연과 ‘6’의 의미


현재 KLPGA에 등록된 ‘이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는 모두 여덟 명이다.

그중 여섯 명은 정회원이고 나머지 두 명은 준회원이다.

이번에 인터뷰를 한 1996년생 루키 이정은에게는 이름 뒤에 ‘6’이라는 숫자가 붙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이정은’들이 모두 선배라는 뜻이다.

협회에서는 이름이 같을 경우 이름 뒤에 숫자를 부여해 구별하고 있다. 혹

여 상금이 다른 선수에게 지급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저보다 먼저 정회원이 되면서 ‘6’이라는 숫자를 가져가길 바랐어요.

이름 뒤에 행운을 상징하는 ‘7’이 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발음하기도 ‘식스(Six)’가 편한 것 같고 솔직히 골프에서는 ‘6’이라는 숫자가 좋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KLPGA투어는 다른 해외 투어처럼 ‘플레잉 네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같은 이름을 쓰는 선수가 계속해서 생긴다면 20이나 30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이름을 바꾸거나 가명을 사용해볼 생각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주변에서는 그런 권유도 있었는데 그래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인데요.

아버지 이름(이정호)이랑 어머니 이름(주은진)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에요.

제가 태어날 당시에는 그게 유행이었다고 해요.

아버지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름이 좋으니까 이렇게나 많은 선수들이 쓰고 있는 게 아닐까요?”

 


 

 

효녀 골퍼 그리고 밀크 커피


어느 날 대회장에서 휠체어에 몸을 싣고 딸을 응원하는 아버지를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던 이가 있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서로가 누군지 잘 알지 못했다.

같은 조에서 플레이하던 선수와 관련이 있다는 정도였다.

몇 개월 후 매니지먼트 계약을 제안해온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탄 휠체어를 밀어주던 이와 동일인임을 알게 됐다.

이정은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물론 그 이유로만 계약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고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든든한 분이 대표로 있는 회사라면 그 누구라도 좋아할 것 같은데요.

저는 훌륭한 소속사를 만났고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후원해주는 회사까지 생겼어요. 정말 복이 많은 사람 같아요.”

이정은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지만 180명 정도의 소규모 팬클럽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정은의 착한 심성 때문에 응원하게 됐다고 말한다.
 

남다른 집안 사정 때문에 철이 빨리 들어 남을 배려할 줄 알고 겸손함과 실력까지 갖춘 선수라며 치켜세웠다.

선수 사진을 목에 걸고 다니는 열혈 팬부터 이름을 모자에 붙이고 다니는 삼촌 팬까지 그 구성원도 다양하다.

“스스로를 효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주위에서 자꾸 효녀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시는데 솔직히 부담스러운 면도 있어요.

그냥 제가 처한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골프는 잘하는데 인성이 나쁘다는 말은 정말 듣기 싫어요.

저는 골프로 최고는 아닐지라도 심성이 착하고 바른 사람이라는 소리가 더 듣고 싶어요.”

밝게 웃으며 스튜디오에 들어서던 첫인상과 효녀라는 말에 발그레 얼굴을 붉히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꿈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크게 어긋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커피와 설탕 그리고 우유가 잘 섞인 따뜻한 밀크 커피처럼.
 

Lee Jeong Eun 이정은 20세 신장 171cm
학력 : 순천 봉화초-연향중-청암고-한국체대 재학
경력 : 국가상비군(2014), 국가 대표(2015)
주요 성적 : 베어크리크배 우승(2013), 호심배 우승(2014~2015),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개인전,

 단체전 금메달, KLPGA신안그룹배점프투어 10차전 우승(이상 2015)

 

기사제공 골프다이제스트

 

 

 

 

리스트로 돌아가기